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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01

《그녀는 기억을 베고 일어났다》


🌙 1장 – 달빛은, 낫처럼 얇게 가라앉았다.

새벽도 밤도 아닌,
그 사이의 시간.
어둠이 완전히 잠들기 전,
세상 전체가 잠깐 호흡을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없고,
풀잎 하나 떨지 않는 잊힌 묘지의 가장자리.
검게 마른 흙 위로 가느다란 안개가 기어오르고,
달빛은 뿌연 그늘 사이로 비석 하나하나를 조용히 핥고 있었다.

그곳 한가운데,
기억에 없는 밤처럼 조용히 소녀가 눈을 떴다.

그녀의 긴 속눈썹 위로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숨을 들이쉬자 먼지 섞인 공기 속에서
무언가 오래된 감정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가슴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쥐었다.

“…이건… 내 거였나…?”

기억은 없었다.
이름도, 과거도.
하지만 손에 들린 그림자 낫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손에 감겼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이 낫을 수천 번은 쥐어본 듯 익숙했다.


🔥 2장 – 시리온, 그리고 ‘관측 중단’

반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작은 목소리 하나.

“아, 여기였구나…”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온 사람은,
하늘빛 코트를 입고
두루마리처럼 길게 말린 문서들을 끌고 다니는
신입 신 시리온이었다.

그는 묘지 전체를 훑어보더니,
눈앞에 펼쳐진 낫 소녀를 보고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또 시작된 건가요.
이번엔 제가 안 눌렀는데요... 진짜로...”

그는 조심스레 관측 장비를 켰다.
기기 화면에선 포탈 감응 수치가 빠르게 튀고 있었고,
그 중심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빛 한 점 없는 눈동자로 시리온을 바라보았다.

“기억은… 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을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시리온은 잠시 망설이다,
정확히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진짜로 어디선가 마주쳤던 것 같았다.
기억나지 않는 어딘가에서.


🌫️ 3장 – 기억이 흘러나오는 밤

시리온은 손에 들고 있던 수정 조각을 꺼내
그녀의 차원 파장을 감지하려 했다.
하지만 분석은 완료되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그녀의 낫이 먼저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용히 한걸음 앞으로 나섰고,
낫을 바닥에 스치듯이 그었다.

그 순간,
묘지 한복판의 공기가 투명하게 일렁이며 갈라졌다.

  • “기다릴게…”
  • 이름 없는 무덤
  • 손을 꼭 잡은 두 아이의 실루엣
  •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 뒤를 감싸던 순간

그건 영상도, 목소리도 아니었다.
기억이 공기 속에 스며든 장면,
그녀의 낫이 베어낸
누군가의 마지막 감정이었다.

그녀는 미동 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조금 떨었다.

“이건… 제 기억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요.”

그 말에 시리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관측 장비를 바라봤다.
귀여움 수치 측정기와 감정 반응 지표는
이미 치명적 과부하 경고를 띄우고 있었다.


🌀 4장 – 기억 폭주

그리고 그 순간—
기억이 폭주했다.

그녀의 낫이 조금 더 흔들리자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고,
묘지는 더 이상 묘지가 아니었다.

망각의 세계,
시간이 흐르지 않고 기억이 에너지가 되는
그 잊힌 차원의 단면이
현실과 겹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석들은 흐릿한 얼굴을 갖기 시작했고,
바닥 위의 그림자는
마치 살아있는 듯 몸을 뒤틀었다.

“이건 진짜 아니에요…
진짜 아닌데요…?”

시리온은 황급히 장비를 끄고
뒤로 물러섰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분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낫을 쥐고
숨을 한 번 들이쉬더니—
‘기억’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 5장 – 기억이 가라앉고

모든 기억의 잔영이 사라지자
묘지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된 듯한 무덤 하나 앞에 섰다.

무덤엔 이름이 없었지만,
그녀는 잠시 머무르더니
작게 속삭였다.

“여기에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가 여기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의 말투엔 확신도 없고,
희망도 없었다.
그저 감정이 남은 자리의 흔적처럼
조용히…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시리온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에르넬리아.
지금부터는 그렇게 부를게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 시리온의 업무일지 발췌

📁 관측일지_#001
이름: 에르넬리아
차원 코드: OLBN-03 (망각의 세계)
고유 능력: 기억 복원 / 영혼 기록 투시
소환 방식: 자율 발생
상태: 기억 봉인 / 감정 반응 과민
귀여움 수치: 기기 다운 (측정 불가)
추가 메모: 펜던트 내부에 고대 차원 반응 있음


📌 마무리

그날 이후,
에르넬리아는 시리온의 관찰 대상 1호로 등록되었고
차원관리국 내 가장 조용하면서도
위험한 ‘아이’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그날 묘지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포탈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 Episode 02 – 달콤한 유령의 조우
: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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